고구려 국내성 답사 기행문  - 이 희 세  nagara56@hitel.net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집안(集安)까지

 8월 2일(수)에 백두산 천지를 보고 천지 폭포와 소천지, 백두산의 원시림(지하삼림)을 둘러본 우리 일행은 이도백하에서 한밤중인 1시 20분에 출발하는 침대열차를 타고 통화(通化)로 향하였다. 장거리 운행이 많은 탓인지 기차의 객실과 통로에 간이 식탁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국내성터가 있는 집안으로 가는 관문인 통화에 내린 시각은 8월 3일(목) 오전 9시가 넘었다.

통화에서 집안으로 갈 때는 60년대 시골에서나 운행했던 것 같은 낡은 버스를 이용했다. 시동 버튼을 한참이나 눌러야 간신히 시동이 걸리던 그 버스는 엔진소리가 유난히 컸고 에어컨 설비도 갖추어지지 않아 무척 더웠다. 그래도 40대 중반의 운전기사는 이 낡은 버스를 아주 능숙하게 운전하여 험한 노령산맥을 유유히 잘도 넘어갔다.

통화 일대 역시 길림성에 속한 지역이지만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정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였던 화룡, 용정, 이도백하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글과 한자가 병기(倂記)되어 있던 연변지역과 달리 눈에 띄는 간판부터 한자 일색이었고, 지형도 벌판이 많았던 연변지역에 비해 산이 많았다. 논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주로 밭이 많이 눈에 띄었다. 산 중턱에까지 포도밭과 인삼을 재배하는 인삼포가 널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통화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특산물이란다. 꽤 험준한 노령산맥의 협곡을 따라 꼬불꼬불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리자 집안으로 흘러드는 통구하가 찻길과 나란히 흘러가고 있었다.

  

고분군과 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

 집안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 동쪽으로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가 조그맣게 보이고, 옥수수밭 여기저기에 우거진 잡풀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동산같은 고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 우리는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고구려에 온 것이다. 북으로 우산(禹山), 남으로 압록강(鴨綠江)-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남향받이에, 한적한 우리의 시골 어느 읍내같은 분위기로 국내성은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성은 북으로는 높은 산들이 가로 막아주고 남으로는 압록강이 흘러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약 400여년 간 고구려의 도읍지였다고는 하지만, 왜 이 집안 지역에만 약 1만 2천여기의 고분들이 몰려 있는 것일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평양에서부터 여기까지 시신을 모셔왔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장군총은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거대한 화강암을 다듬어서 계단식으로 7층을 쌓아올려 피라미드식으로 만들었는데 높이가 12.4m, 각 변의 길이가 31.58m에 달한다. 동쪽 측면에 설치된 철제 사다리를 올라가면 5단 중앙의 구멍을 통해 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m, 높이가 5.5m에 달하는 상당히 넓은 공간으로, 그 안에는 석관을 안치했을 직사각형 대좌가 두 개 설치되어 있었다. 무덤 정상부는 잘 다듬은 한 개의 커다란 돌을 덮어 놓았는데 그 무게만도 약 50t에 달한다고 한다. 장군총의 각 면마다 커다란 바위를 세 개씩 받쳐 놓았는데 이는 엄청난 돌의 무게에 무덤이 밀려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쪽 면에 있던 세 개의 바위 중 하나가 없어져서 힘의 균형이 깨지는 바람에 그 부분이 조금씩 밀려나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더구나 철제 계단을 설치하기 위해 쌓아올린 돌에 구멍을 뚫고 쇠볼트로 고정시켜 원형을 훼손한 것은 문화재 보호에 대한 중국 당국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위용은 그 역사적 가치로 인해 한층 더 거대하게 다가왔다. 일제의 비문 조작설이 제기되면서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이 비석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인간들을 내려다 보며 1천 6백년의 세월을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위대했던 고구려의 정신을 간직한 채 아직도 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비석을 가까이서 멀리서 바라보면서, 비석만은 알고 있을 역사적 진실을 밝혀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성터와 압록강

 국내성의 오랜 역사에 비해 남아 있는 국내성터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높이 6∼7m였다던 성벽은 거의 다 소실되고 일부만 간신히 형태만 남아 석축처럼 보이는 국내성터 위엔 잡풀만 무성했다. 국내성터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고 무너져 가는 석벽 앞에는 간이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리어카 위에 물건을 올려 놓고 파는 중국인 상인들과 무심히 오가는 행인들 틈에서, 감개어린 표정으로 성벽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사진을 찍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국내성터 답사를 마치고 집안시 남쪽을 흐르는 압록강으로 향하는 우리들은 강 너머로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설레었다. 이 부근은 압록강의 중류라서 그런지 강폭이 별로 넓지 않아서 건너편의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강원도 철원이나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도 철조망 너머로 아득히 북녘땅을 바라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가까이에서 남쪽에 있는 북녘땅을 바라보는 감회는 새로왔다. 둘러보면 산하는 예나 이제나 이쪽저쪽이 같은 모습으로 구별이 없는데, 그 위의 인간들만 '옛날 고구려 때는 여기도 내 땅'하고 아쉬워 하고, '저곳은 지금도 내 땅인데도 왜 못 건너가나' 하고 안타까워 한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압록강에서의 추억 두 개. 하나, 모터보트로 압록강 위를 달리며 더위를 잊었던 짜릿했던 순간!-우리 모두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쳐오르던 까닭모를 느꺼움으로 온몸이 뜨거웠었다. 둘, 한 밤중에 어둠 속을 흘러가는 압록강물 바라보며 마셨던 독한 빼주 한 잔!-가이드와 피곤하다는 장단장님을 억지로 앞세우고 나가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오토바이택시를 잡아타고 압록강변을 달려갔었지. 어둠에 묻힌 압록강변의 이곳저곳에서 중국의 젊은 연인들이 부둥켜 안고 데이트하고 있었다.

 

수혈(隧穴)과 통천혈(通天穴)

 8월 4일(금) 새벽 5시 반에 강회장님과 심선생님을 모시고 수혈(隧穴)과 통천혈(通天穴)을 찾아 나섰다. 옛 기록에 국동대혈(國東大穴)로 표현된 이곳은 국내성터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안내인이 따라나와 동행해 주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산 아래에서는 산자락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산굽이를 돌아서자 압록강이 남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에 수혈이 숨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혈(隧穴)은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던 장소다. 나라의 동쪽에 있는 동굴에서 수신을 맞이하여 강 위에서 모시고, 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동굴은 모든 것이 태어나는 성소(聖所)의 의미를 지니며, 땅의 신이 출입하는 통로이다. 또한 여성적 기능을 의미하므로 유화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혈을 지나 약 10분 정도를 더 올라가니 양쪽이 마주 뚫려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동굴이 나타난다. 이곳이 통천혈(通天穴)이다. 통천혈은 옛날 고구려에서 매년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동맹행사가 열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장소에 찾아와 기록에나 있는 줄 알았던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면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그런 기회를 주신 강회장님-고마워요!)

수혈과 통천혈을 답사하고 내려오는 길에 전혀 뜻하지 아니한 수확을 거둔 게 있으니 바로 애혈(愛穴)이 눈에 띤 것이다. 얼핏 지나치면 잘 알아볼 수도 없을 작은 바위굴 앞에 '장상애(長相愛)'라는 글이 붉은 글씨로 씌여 있었고 그 앞에 조그마한 안내판이 서 있었다. 아니 이곳이 유리왕이 '황조가(黃鳥歌)'를 지은 바로 그 자리라니! 깜짝 놀랄 정도로 반가웠다. 국문학사 첫머리에 배경설화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서정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황조가인데 그 설화의 현장에 내가 서 있다니! 안타까이 치희(稚姬)를 외치며 말달려 이곳까지 단숨에 쫓아왔을 유리왕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가이드를 통해 동행한 안내인에게 이곳에 꾀꼬리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어렸을 때는 많이 보았으나 요즘은 잘 볼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환도산성(丸都山城)과 산성하고분군(山城下古墳群)

 환도산성은 국내성이 있는 집안시에서 북서쪽으로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국내성에서 적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옮겨와 최후의 저항을 하기 위해 지은 성이란다. 통구하를 건너 잘 자란 옥수수밭을 지나 좁은 산길로 30분 정도 올라간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연지세를 이용해서 지은 성으로 성벽의 총둘레가 7Km에 이르는 대규모의 성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무너진 성터 입구에 '丸都山城'이라는 표지석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라는 작은 물웅덩이 하나, 흙을 쌓아 올려 유사시 지휘소로 사용했다던 높은 흙언덕이 잡초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환도산성 아래에는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다. 여러 종류의 흙무덤과 돌무덤이 같이 모여 있어, 고구려 무덤의 다양한 형태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역사 교육장이었다.

 

오회분 오호묘(五 墳 五號墓)

우산고분군 최남단에 5기의 봉토고분이 일열로 자리잡고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5기의 봉토분이 거대한 투구와 같다고 하여 '투구 회( )' 자(字)를 써서 5회분(五 墳)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중 5호분의 내부를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고구려 벽화무덤의 찬란한 벽화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무덤의 석실 내부로 들어가자 한여름인데도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이곳에 그려진 벽화는 사신도(四神圖)였다. 가이드 조춘호씨가 왼손으로 높이 쳐든 전구의 불빛을 받아 1600여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인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 꿈틀거리는 모습들은 금방이라도 벽에서 뛰쳐나올 것같이 생동감이 넘쳐흘렀고, 벽면에 칠한 색채는 바로 어제 그린 듯 선명했다. 서늘한 석실 안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벽화의 세세한 부분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던 조춘호씨의 억센 평안도 사투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이 용의 그림을 보시라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디 않습네까?"

자랑스레 벽화를 설명하던 '조선족' 그의 얼굴도, 홀린 듯 입벌리고 감탄스레 벽화를 바라보던 '한국인' 우리들의 얼굴도 분명히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민족의 얼굴이었다.

작성일 2000-09-04 오전 8:29:06

 

제목 백두봉(白頭棒)은 건재합니다

선재의료회 제1회 해외진료봉사단에 함께 참여하셨던 여러분들께

안녕들 하셨습니까? 서울사대부고에 근무하는

<"이" "희"한한 "세"상>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다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국내성 답사기도 강회장님 독촉전화를 받고서야 시작해서 어제(9월2일)서야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답사기를 쓰면서 함께 했던 7박8일 동안의 중국 체류기간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꿈인듯 아련하게 떠오르는 잊지못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여~러 분이 궁금해 하시는 백두봉(白頭棒)은 건재합니다.

목공소를 운영하는 학부형께 부탁하여 아주 알맞은 길이로 잘라 잘 다듬어 참 예쁜 "백두봉"으로 만들었습니다.

개학 첫날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봉사활동과 백두산 및 국내성 답사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모두들 눈빛을 빛내며 재미있게 듣더군요. 그리고 백두산에서 모두에게 줄 선물을 하나 가져왔다면서 "백두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 나무로 만든 "백두봉"이라고.

"백두봉"은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아이들이 직접 제 책상에서 가져 와서 종아리를 맞는데 쓰입니다.

아이들이 백두봉으로 종아리를 맞을 때는 아주 진지해집니다.

 

이종린 선배님!

저도 20여 년 만에 형을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중국 가기 전에 산 형의 책을 마저 읽고 있습니다. 종종 뵙고 법담을 나눌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연하야, 현지야,

선생님이 준 책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왕창 올리기 바란다.

 

오늘 봉은사 진료소에 나갔었습니다.

간간히 뵙기로 하였습니다.

 작성일 2000-09-02 오전 4: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