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풍류  - 수명자 강경구

이 번에 압록강 가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노래가 불려진 현장을 찾았습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꾀꼬리 노래)는 노래가 지어진 배경과 내용, 그리고 가사까지 전하고 있어서 우리 나라 처음 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리왕은 첫 정을 주었던 왕비 송씨 부인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매우 비통해 합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왕에게 재상이 소개하여 화희부인이 들어 왔습니다. 그에 때맞추어 중국에서도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맺으려고 치희부인을 보냅니다. 유리왕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대국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부인들이 고구려 출신인 화희는 중국을 되놈이라고 하면서 무시하고 중국인인 치희는 고구려 여자인 화희를 시골뜨기라고 업신여기고 하여 서로 불화하는 것입니다. 대왕은 하는 수 없이 이궁을 지어서 다른 골짜기에 살게 하고 잘 안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 사이가 어디 그렇게 해결이 됩니까?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두 여인은 맞 부딛히게 되었고 끝내는 크게 싸우고 말았습니다. 싸움 끝에 치희는 말을 타고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나중에야 알게된 유리왕이 화급히 사자를 보내고 스스로 말을 몰고 수 십리를 좇아 나섰습니다만 마음이 떠난 여인을 다시 돌려 올 방책은 대왕님에게도 없었나 봅니다. 홀로 남게된 유리왕이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무 아래에는 여러 마리의 꾀꼬리가 어울려서 돌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즈윽히 마음속에 두고 있던 치희를 잃어버린 유리왕이 남달리 감회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지은 시가 황조가입니다.

수명자는 이희세, 심영수 님과 함께 고구려 수도의 동방 산골짜기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5시 반에 300 미터 고지를 올랐습니다. 예로부터 신성한 제사장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커다란 동굴이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 서픔에 황조가가 불려진 현장을 찾을 수 있어서 놀라웠습니다. 동행하던 이희세 님이 찾아낸 곳은 '사랑의 동굴'(애혈)이라고 쓰여진 특이한 바위굴이었습니다. 그 앞에는 '길이 서로 사랑하리'(장상애)라고 쓰여진 바위가 있고 그 앞 안내판에 그 곳이 고구려 유리왕이 황조가를 부른 장소라고 적혀져 있었습니다. '장상애'바위는 두 마리의 새가 주둥이를 마주 쪼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전설이 생겨난 모양입니다. 수명자는 그 안내판의 진위에 대하여 깊이 음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현지인들이 조작한 것은 아닐터이니 국문학도가 학계에 소개하면 좋을 듯합니다. 작은 신성한 공간에 잠깐 발을 내린 것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느낍니다. 여기 간단히 황조가를 소개하겠습니다.

 펄펄 오르내리는 꾀꼬리,

암수 두 짝이 서로 노는데,

나는 눈물겹도록 외로워라,

그 누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나.

 인생의 고독을 짤막하게 읊은 명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성한 수신을 모신 굴에서 치제하고 나서 제사 터에서 돌아오던 길에 장상애 바위에 들른 것입니다. 유리왕이 새삼스레 인생을 회의하고 그것을 노래한 것도 그럴듯한 일입니다. 수명자도 같이 돌아갈 사람이 없음을 뼈저리게 노래하고 싶습니다.